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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 0%를 향하여

서이제 작가의 소설집 <0%를 향하여>를 읽었다.
탈형식적인 실험 소설들이 담긴 소설집이었다. 표제작이 다루는 소재이면서 주제 의식을 관통하는 게 영상과 영화인데 개별 작품들은 일반적인 플롯과 서사의 서술이 아닌, 영상과 이미지를 편집해 붙여 놓은 듯한 특이한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흔히 이미지라는 단어가 소설에 붙을 땐 묘사가 섬세하고 대상이 구체적이며 내면에서 바깥이 아닌, 외형을 통해 내면으로 들어가는 방식의 심리 서술을 택하는 작품인 경우가 많은데, <0%를 향하여>는 좀 다르다. 이미지를 구현함에 있어 감각적인 서사와 묘사에 천착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언어적 서술을 거부하고 프리미어 편집 툴로 영상을 잘라 붙이듯 장면의 조각들을 붙이는 방식을 택한다. 그래서 개별 이야기 안에서도 단락들이 분절된다. 오히려 이야기를 하나로 만드는 건 스토리가 아니라 반복되는 표현과 문장이다. 문장 역시 미문이거나 주제의식을 만들어 내는 역할에는 관심이 없고 소설에 역동성을 부여하고 흩어져 있는 이야기를 아우르는 커다란 울타리 역할을 한다.
소설이란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방식의 소설을 마주하면 잠시 고민하게 된다. 익숙한 독법을 배반하게 되면서 평소 작동하지 않았던 감각이 살아나기 때문에 독자로서 크나큰 자극을 받지만, 감각과 자극을 가라 앉힌 후 남은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드려야 하나를 고민하게 된다. 애초에 이런 방식의 소설에 이야기를 묻는 것 자체가 우문일 수 있겠지만, 장르의 팬일 수록 오히려 그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게다가 그 질문과 소설의 간극에서 이 작품은 오히려 더 확장되는 경험을 한다. 별 기대 없이 사방이 거울로 빚어진 트릭 미로를 완주하는 이들은 잠시간의 황홀을 즐긴 후에 다시 현실로 돌아가지만 방 안의 트릭을 탐구하는 사람은 자꾸만 눈 앞에 있던 환상을 되짚어 보게 된다. 오히려 환상 안에 더 오랫동안 머무는 이들은 소설을 의심하는 사람들이다.
가장 좋았던 작품은 <미신> 이었다. 이야기는 사건과 인물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화자의 입장에서 사람인지 귀신인지 모를 대상을 보이는 대로 그린다. 그리고 그 시선은 사각으로 제한된 카메라의 상처럼 오염되고 부정확하며 매우 가려져 있다. 불가해한 세상을 시야라는 좁은 인식으로 그린다. 그러면서도 그 한계가 이야기를 확장하며 바깥의 이야기를 끌어오는 시도를 한다. 물론 제한된 시야가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주술처럼 반복되는 문장으로 다시금 긴장을 부여한다. 아주 영리하고 효과적인 테크닉이다. 이는 묘사보다는 연출의 영역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 것이고, 이 소설이 태도이자 지향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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