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24
#음식남녀
영화 <음식남녀>를 보았다. 94년에 개봉한 대만 영화로 감독은 세계적인 거장이 된 이안이다. 이는 영화를 다 본 후 알게 된 정보로 어떤 힌트도 알지 못한 채 영화를 다 봤다. 코로나 시대, 극장이 아닌 곳에서 영화를 볼 때면 영화를 보는 중간 나무 위키를 켜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데, 스토리에 대한 궁금증이 이야기 전개를 앞질러버려 감상은 엉망이 되고야 만다. (나처럼 멍청한 영화 감상을 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이러한 습관이야말로 인생을 시시하게 만드는 것 중 하나라고 생각하여 이번에는 핸드폰을 뒤집어 두고 키보드도 봉인해둔 채 영화를 보았다.
영화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와 매우 비슷했다. 혼자가 된 노년의 남성과 결혼 적령기가 되어 집을 떠나기 직전의 딸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며 자택의 실내가 주요 배경이란 점도 비슷했다. 이 영화에서는 부엌이 좀 더 자주 등장한다. 노년의 남자 주인공 '주선생'은 주로 부엌에서 요리를 한다. 평생 요리사로 살아온 주선생에게 주방은 자신의 분신 같은 곳이며, 영화는 요리를 하는 능숙한 움직임을 통해 그의 삶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정적인 배경 안에서 삶과 죽음이라는 큰 틀을 그리며 큰 갈등보다는 정서적 긴장을 내파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이 역시 오즈의 영화와 비슷하다.
영화는 주선생이라는 축으로 동심원을 그리는 세 딸과 주변 여성 인물들의 사연을 사려깊게 그린다. '가족이란 각자 독립된 생활을 하면서도 서로를 염려하는 것'이라는 주선생의 말처럼, 세 딸과 금영, 금영의 모는 각자의 인생을 향해 뻗어나고 있지만 주선생과 음식으로 상징되는 강력한 축에 매여 그 주변을 공전한다. 주선생 가족은 일요일마다 함께 식사하는 원칙을 갖고 있는데 일류 레스토랑에서나 맛볼 수 있는 산해진미가 올라오더라도 번거롭고 귀찮은 규칙으로 다가올 뿐, 각자의 바쁜 일상에서 시간을 내야 하나는 수고를 들여야 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리에 모이고 꾸역꾸역 이야기를 꺼낸다. 그게 가족이기 때문이라는 듯이. 밖으로 뻗어나가는 개별자의 삶과 이를 붙드는 가족이라는 짙은 중심원이 서로 길항하며 빚는 긴장이 영화 전반에 흐른다.
이미 야스지로 영화에서 충분히 봐서 그런가 영화 중반부부터는 세 자매가 아버지의 곁을 떠나며 외롭게 남는 노인의 모습을 영화가 마무리될 것으로 예상이 됐는데, 영화는 말미에 가서 그 기대를 저버린다. 저버리는 수준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이용해 더 큰 충격을 주는 고약한 엔딩을 준비한다. 이런 적극적인 반전은 오즈식 플롯을 비트는 변주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오즈의 영화세계와는 다른, 혹은 이를 넘어선 자신만의 영화와 인생관을 드러내려는 의지를 함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삶에 대한 관조와 처연한 시선, 쓸쓸함이 주는 우아함이 오즈 영화의 미학이라면 <음식남녀>에서는 저물어가는 삶의 모습 속에서도 내일을 긍정하는 에너지가 영화의 깊은 곳에서 꿈틀거린다. 아내가 떠난 후 길어진 하루의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동경이야기>의 히라야마와 달리 주선생은 아침이 찾아오면 어김없이 조깅을 하고 음식을 만들고 그러다 새롭게 찾게 된 '음식의 맛'에 감응한다. 오즈의 영화가 우아함을 지키기 위해 입을 다무는 영화라면 <음식남녀>는 삶의 충만함을 느끼기 위해 기꺼이 혀를 내미는 영화랄까. 아무튼 주선생이 미각을 되찾으면서 지은 표정을 보는 순간 관객의 마음에도 생기가 돋는다.